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닌그라드 공방전 (문단 편집) === 1943~44년 === 이렇게 1942년이 지난 뒤, 1943년 1월에 소련군은 또다시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을 뚫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이스크라 작전]]으로 이름붙은 이 공세는 성공을 거두었고, 라도가 호 주변의 땅이 소련군 손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포위망의 일부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스크라 작전의 성공으로 힘을 얻은 소련군은 그 직후인 2월에 주코프의 지휘로 이보다 더 대규모의 공세인 북극성 작전을 벌였지만, 독일군을 일부 격퇴하는 데 그치고 다시 교착 상태가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레닌그라드 공방전/win.jpg|width=100%]]}}} || 이후에도 계속 독일군의 산발적인 공세가 이어졌지만, 이미 전황은 소련에게 기울어진 상태였다. 소련군도 1944년이 되자 이번에는 기필코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을 모두 풀어버리겠다는 기세로 맹공격을 퍼부었고, 물자와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은 결국 1월 말에 레닌그라드로부터 60~100km 떨어진 지점까지 밀려나 시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포위망이 사라지면서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다. 소련군은 물러난 독일군을 향해 반격을 개시했지만, 소련 남부 전선과 달리 레닌그라드의 고위 장교들은 대부분 전쟁 내내 방어전에 매진했던 탓에 세련된 공세 전략을 습득하지 못했고, 때문에 소련군의 공격은 굉장히 서투르게 진행되었다. 독일군의 방어선 역시 소련군의 예상보다 견고하게 구축되어 소련 보병들은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2월 20일엔 소련군이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26일에는 공식적으로 레닌그라드가 해방되었음이 선포되어 포병대가 예포를 쏘며 승리를 자축했다. 900일간의 봉쇄기간 동안 독일군은 공중폭격 10만 7158발, 포탄 14만 8478발을 레닌그라드에 쏟아 부었다. 거의 하루에 300발 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